빵을 만들다가

조회 수 3060 추천 수 0 2010.05.08 11:58:40

빵을 만들다가

오늘 아침 만든 식빵 by dion

 

 

오랜만의 일기다.

새로 취직한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일한지 1달 반만에 처음으로 조퇴를 하였다.

목이 아팠고, 열이 났다. 밤새 아팠다. 조금 늦잠을 자서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늦게 온 점장이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얼른 들어가라며

다음부턴 이렇게 아프면 전화하고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

신기하다. 지금껏 학원과 연구실에 있을 때는

주어진 일을 다 소화하기 전까지는 아프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며

입원이 아닌 이상 참으면서 일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가끔은

긴장이 풀려서 아픈 거라면서 슬쩍 비난을 듣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살짝 열이 있다고 나를 그냥 돌려보내다니.

 

여튼, 집에 와서 푹 자고, 점장이 싸준 감자샐러드 샌드위치를 대충 씹어먹으며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그래도 낫질 않고 기침과 열이 계속 나긴 한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목에 찬바람이 든게 원인이겠지만

하루도 쉴 날 없이, 어린이날에도 하루종일 집에 페인트칠을 해서 피곤했던 게 문제였을 것이다.

정말 한 시도 가만 쉬지 못하는 성미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빈마을 생활을 그냥 훌렁훌렁 지낼 수가 없어

하루 하루 바쁘니 이렇게라도 휴식이 다가오는 게 반갑기까지 하다.

 

 

빈마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은 다시 또 하루 하루가 세미나요 미팅이요 회의다. 아주 그냥

단 하루를 조용히 지낼 수 없다. 함께 사는 ㅇㅅ이 블로근지 트윗인지에다가

“빈마을에 사는 게 버겁다. 운동의 속도로 살자니 너무 빠르고, 삶의 속도로 운동하자니 너무 느리다.”

라고 했다던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쩌면

이 어중띠고 피곤한 가운데 하나의 선이, 새로운 속도가 발명되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운동과 생활이 분할될 수 없음에서 생성되는 기묘한 속도.

구체적으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빈마을 금고 논의, 빈가게 논의들.

그것은 가치의 척도와 체계의 측면에서 기존 사회의 당연한 형식들을 뒤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것을 자본주의의 바깥 경제, 혹은 그 외부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얼마만한 파급력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여기서

우리를 피곤에 쩔게하는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모임’들이 형성되고 있고,

그것이 회의든 모임이든 잠깐 술자리든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런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전심전력으로 토론하는 중에 어떤 질감이 형성되고 있는 중인 거다.

 

4일 전에 처음으로 빵을 만든 이후, 빵만드는 재미까지 붙어 더더욱 바빠졌는데,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아침에 식빵과 넙대대한 빵, 그리고 바나나초코칩머핀 6개를 구웠다.

참 재미나다. 빵이 부푸는 게. 상이한 배합에 상이한 모양. 같은 배합에도 다른 빵이 탄생하기도 하고. 여튼 빵에 비유를 하면,

1주일에 한 번 보다가 2주일에 한 번 보다가 1달에 한 번 보는 식으로 멀어지던

최근 3달 정도의 관계들은 빵 반죽으로 치면 1차 숙성과 2차 숙성 중간에 있는

휴지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거다.

우리는 이 반죽덩어리를 헤엄치는 효모무리들과 다르지 않아,

시간이 흐르고 활동이 모이고, 쉬었다가 숙성되는 단계들을 거쳐 마침내

찰진, 하나의 덩어리, 모양도 형체도 아직 갖춰지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인 것이다.

 

 

 

이제 그걸 식빵틀에 넣거나 머핀틀에 넣어 그에 맞는 온도로 구워내야 한다.

그 전까지 효모들은 스스로 지치지 않도록 시간을 갖고 움직이며 너무 치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탄력이 붙는다’라는 말을

나는 빵을 굽고 빈마을 금고를 재차 이야기하고 있는 이제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삶/운동의 형식이 얼마만큼 부풀어오르고 어떤 맛과 향을 낼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효모들은 밀가루와 물과 소금 사이를 헤엄치며 존재론적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두리반으로 향하는 옆집 사람. 201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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